Friday, October 4, 2019

만월의 약속 (정연주) 10~13장

"하루종일 이 곳에 계셨다고 하더이다"
무햐는 무언가를 살피려는 듯 어두운 황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화화
는 그녀가 무얼 찾으려 하는지 몰랐지만, 휘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녀가 눈
치챌까 두려워 시선을 제대로 맞출수가 없었다.
"휘문이 그놈이 내가 황녀님을  빼돌릴까 저어하여 일을  만들기가 어렵더이다.
그래도 다른 마을 장로들이 모두 힘을 모았소. 휘문이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
나시오"
무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화화에겐 전혀 뜻밖이었다. 너무나 놀라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화화는 무햐를 쳐다보았다. 휘문에게 계속 그녀를  놔주라고 말
했었지만, 화화가 자기를 풀어달라고 접근했을 때 할멈은 고개를 돌리며 휘문만
이 그녀를 돌려줄 수 있다고 했다.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휘문만을  감싸는 할
멈의 행동에는 휘문에 대한 깊은 사랑이 숨어 있었다.
"정말... 날 풀어준다는 건가요?"
"그렇소.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떼죽음을  당할거요. 제 아무리 휘문이 용맹하고
지혜롭다 하나, 여자 하나에 미쳐  골짜기에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모를만큼
그아인 인간사에 미숙하다오. 한가지만 약속해  주겠소? 방화촌을, 휘문을 용서
해 주겠다는? 그것만 약조하면 황녀님은 자유요"
"약속해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아요. 절대로..."
이번엔 화화도 할멈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순박하기 이를데 없는  마을 사람
들을 고발할 생각은 없었다. 돌아가서 아무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아
리 황녀라면 그녀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다시는 무등산 근처에도 오지 마시오.  그 어리석은 것이 다시  미치지 않도록
죽기전까지 이곳엔 다시는 오지 마오"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마을 청년들  대신 장로 세명이 어슬렁거리며 기다리
고 있다가 갈색의 건강한 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휘문에게..."
"제가 가르쳐준 길로만 쭉 가시오. 그쪽은  비상로라 휘문은 다른 길로 올거요.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전에 안전한 곳으로 가시오"
무햐가 굳은 표정으로 망설이는 눈빛의 황녀를 다그쳤다. 장로들도 모두 어두운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화화는 이주동안 휘문과 함께 생활했던 움막을 향해 일별을 던진 후 말에 박차
를 가했다.
난 이제 자유야!
자유야... 황궁으로 돌아가는 거야...
가슴이 벅차 오르는 느낌을 기대하며 화화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희한하게
도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넓
고,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는 부유함이 있는 황궁!  그러나 그곳엔 그녀만을 원
하는 이가 없었다...
"봤지? 그들이 혼비백산해 떠나는 모습을... 하하, 황군은 모두 어리석은 놈들이
야. 무등산의 무자도 모르면서 무작정 들어오더니 꼴 좋다. 휘문의 작전이 그대
로 맞았잖아?"
"역시 휘문이야. 휘문의 예상대로였잖아? 숫자만 많은면 단가? 머리도 없는것들
이..."
휘문과 함께 젊은 전사들은 자신들보다 몇십배는  될 것 같은 황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뜻밖의 기습에 놀란 녹색무리들은 달아나느라 바빴다. 산의
중턱까지 다다른 그들은 산아래까지 쫒겨나 당분간 얼씬도 하지 못할게 분명했
다. 전사들은 지난 번 패배를 정확히 설욕한 기쁨에 들떠 어두운 휘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휘문은 생각보다 많던 황군과 그들의 수장이라는  자가 황녀를 찾기 전까진 포
기하지 않겠다고 소리치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햐의 말처럼 다른  황족의
물건을 훔쳤을때완 이번은 판이하게 달랐다. 휘문은 다른 이들처럼 그들이 그리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젠장... 화화는 내거야!!!
복잡한 생각은 질색이다. 싸움외의 어떤 것에도 휘문은 깊게 생각하는걸 싫어했
다. 화화를 좋아했고, 이미 그녀는  그의 여자가 되었다. 그녀가  과거에 황녀의
신분이었다는 건 상관없었다. 만약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죽이면 그뿐...
그렇지만 무햐의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화화를 가지고, 마을 사람들을 살
리는 방안을 생각해야 했다.
화화는 말고삐를 잡고 말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주의하면서 숨을 죽이고 있
었다. 이길로는 오지 않는다던 할멈의 말과는 달리, 할멈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휘문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그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아니었다면,
화화는 정면으로 그들과 마주칠 뻔했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화화가 숨어있는 나무 풀  숲에서 채 몇 미터 떨
어지지 않은곳에 그들이 나타났다.
화화는 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채 자기도 모르게 눈으로 휘문의 모습을
쫓았다. 부처님이 그녀의 기원을 들어주었는지 다행히 휘문에게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어 보였다.
"빨리 가자"
"하하, 새각시를 얻더니 몸이 달았구나. 휘문, 그래 얼마나 좋았지? 황녀는 무척
예쁘던데..."
휘문과는 동갑인 서융이 짖궂게 질문을 던지자,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전사들도
휘문을 놀리기 시작했다.
"부러우면 너희도 각시를 얻어. 하지만, 화화는 내거니까 눈독들이면 가만히 안
둘테다"
"으구, 저거 완전히 여자한테 미쳤다니까..."
서융이 장난스레 말을 받았다 휘문이 정색을 하자 움찔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화화는 멀어져가는 휘문을 바라보며 가만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가  자기를
알아보았다면, 혹시나 말이 움직여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면... 그러나, 어둠이 깔
리기 시작한 숲속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화화가 근처에 숨어있다
는 것도 모른채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1

 "휘문! 휘문!"
휘문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일까! 화화는 멀어져가는 휘문을  자기도
모르게 부르고 있었다. 숨어있던 나무 숲에서 빠져나와 손까지 흔들며  그가 돌
아봐주길 바랬다.
"화화?"
어디선가 사람소리가 나자, 전사들은 흠칫하며 소리가 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휘문은 화화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화화는 자기 곁으로 달려오는 휘문을 보며 깨달았다. 더 이상  자유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휘문의 곁이 바로 그녀가 있을 곳이었다.
"휘문!"
말에서 뛰어내리는 휘문에게 달려간 화화는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넓고 단단
한 가슴. 심장과 심장이 조화를 이루며 뛰는  소리...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극
락이었다.
"내게서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
극적인 상봉이 지나자, 휘문은 무섭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마을을 벗어나 숲속
에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달아날 수 없다는걸 깨달았어. 난 이제 휘문거야. 너의 말처럼 너의 각
시니까 영원히 너랑 함께 할거야"
화화는 그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비록 그녀를 납치해  왔지만, 그를 선택한
것은 그녀 스스로의 의지였다. 휘문을 선택한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널 사랑해"
배시시 웃어보이는 화화를 보고 휘문은 언제  화가 낫냐는 듯이 스르르 풀어져
버렸다.
어릴 때 기억하던 어미같이 아름답고 예쁜 향기가 나는 나의 각시.
그녀는 휘문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휘문은 처음부터 그녀가 자신의 운명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을 떠날거야. 우리가 떠나고 나면 황녀를 데리고  휘문이 달아났다고 소문
을 내도록해. 그러면 황군들도 무등산에서 떠날거고,  방화촌은 다시 평화를 찾
게 될거야"
휘문은 싸움이 끝나면서 생각했던 계획을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털어놓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속에서 반대의 말이 흘러나왔지만, 무햐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휘문이 황녀와 함께 있으려면 마을을 떠나는게 당연한거다. 그는 우두머리로써
마을의 안전을 생각한거야"
"그래도 안돼. 휘문이 방화촌을 떠나는 건 싫어"
혜류가 벌떡 일어나 휘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화화에게 소리를 지르고 휘문
만큼이나 천방지축이던 소녀가 휘문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휘문은 그런 혜류
를 품에서 때어내 공중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너가 조금 더 자라면 방화촌의 수장이 되겠지? 내가  직접 가르쳤으니, 방화촌
제일의 칼솜씨를 지니지 않으면 이  자랑스러운 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거야.
마을을 너에게 부탁한다, 혜류"
하룻밤만에 그는 무척 어른이 된 듯 했다. 항상 강아지처럼 찰삭 달라붙던 혜류
를 귀찮아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화는 휘문과 혜류에게서 흐르는 그들
만의 정을 보았다. 처음으로 화화는 질투가 무엇인지 알았다.
"간다. 잘있어. 모두들 잘 지내라고... 황제가 싫증을 내면  그땐 예쁜 아기랑 같
이 돌아올게"
"휘문! 꼭 돌아와야 해. 나, 최고의 검사가 되어 있을거니까. 꼭!"
혜류와 다른이들의 눈물어린 배웅을  맞으며 화화는 휘문의  품에 안겨 마을을
떠났다. 늙은 무햐가 마을  입구에 서 있다가 휘문과  화화에게 축복해 주었다.
휘문은 어미와 같은 존재였던 무햐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마음이 아파 더 장난
스럽게 소리치며 말을 급하게 몰아 마을을 벗어났다.
화려한 궁을 버린 자기에 비해 사랑이  충만했던 방화촌을 버린 휘문의 희생이
더욱 컸음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휘문..."
"이제 우리 둘만 있는거야. 하늘 아래 오직 둘뿐이다. 널 사랑해..."
"휘문..."
그가 왕이라고 자신있게 외쳤던 무등산을  떠나 어디로 향할지는 둘다  몰랐다.
그렇지만 화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휘문과 함께 있는 이상, 그녀에겐 세
상이 모두 그녀것인 듯 안전하게 느껴졌고 행복했다.
무등산을 떠난 그들은 이름모를 산에 숨어들었고,  휘문은 짐승을 사냥하고, 화
화는 서툰 바느질을 시작했다. 힘들고 고된  생활이었지만, 화화는 너무나 행복
했다. 한달동안 그들은  서로에게만 열중했다. 적막한  산속에서 사람이라곤 단
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둘 다 외로움의 한조각도 만지지 못했다.
낮에 사냥해온 짐승을 요리해 먹고나면 휘문은 피리를 불었고, 화화는  그의 품
에 안겨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더 이상 휘문의 피리소리는 구슬프지 않았
다. 그의 피리소리엔 사랑과 안정된 충만함이 가득했다. 그의 음악은 화화를 따
뜻이 위로해주는 애무의 손길과 같았다. 피리 소리만으로도 화화는 흥분되어 휘
문의 품으로 파고 들었고, 그러면 휘문도 피리를 내던지고 그녀를  기꺼이 끌어
안았다.
둘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늘아래 서로만이 그들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휘문은 한달만에 둘만의 은신처에서 산의 아래턱에 위치한 마을로 내려왔다. 화
화에게 예쁜 비단옷을 사 주고 싶어 '호란'을 붙잡아 끌고 내려온 것이다. 산짐
승의 왕이라는 '호란'의 껍질이라면 화화가 원래 입고있던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은 비단옷을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막 껍질을 팔고 화화에게 사줄 예쁜 노란색 비단옷을  사가지고 나오는
데, 가게에 앉 아 있던 중년 남자 셋의 대화가 휘문의 발을 사로잡았다.


                                    12

"자네, 소식 들었나? 무등산의 방화촌무리가 기어이 잡혔다네... 마을은 모두 불
타고 살아남은자 겨우 백여명  남짓하다네... 쯧쯧, 그  마을 우두머리가 황녀를
잡아갔다고 하더니, 황제의 노여움이 하늘까지 뻗친 모양일세"
"에구, 천벌 받을놈. 감히 제까짓게 뭐라고 감히 하늘같은 황녀를 잡아가?"
곰방대를 내리치며 두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잠자코 있던 다른  한 사내
가 끼어들었다.
"그럼 잡힌 무리들은 어찌될까?"
"아, 어찌 되긴... 모두 사형이지. 우두머리는 도망갔다고 하니, 다른 놈들이라도
죽여야 황제의 노여움이 좀 가시지 않겠나?"
사내의 질문이 어리석다는 듯 처음 말을 꺼낸 남자가 재빨리 되받았다.
"어디요? 그들이 어디 잡혀 있다는거요?"
휘문은 비단옷을 움켜쥐고 다짜고짜 그들에게 물었다. 자기의 가족들이 모두 잡
혀있다니... 황녀와 함께 떠난이상 그들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디요?"
휘문이 무서운 얼굴로 다그치자 세명의 중년사내가 두려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호탕한 얼굴의 청년이 일그러진 얼굴로  쏘아보니 마
치 '호란'을 만난 듯 했다.
"그...그게... 저 화소거리에서... 일주일 뒤 사형에 처한다는게요. 혹시, 황녀가 돌
아오면 그들을 풀어준다는 얘기도 있더이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휘문의 눈에서  푸른
섬광이 거세게 쏘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휴우..."
휘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훌쩍 사라져 버리자 그제서야 사내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허어... 저 젊은 녀석이.. 그래, 웃어른도 모르고 다짜고짜 사람을 다그쳐? 요즘
젊은 것들이란..."
두려운 기색을 들킨 것이 어색했던지 휘문이  사라지고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
이지 않자, 그제서야 사내는  다른 두 사내에게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내 역시 휘문에게  겁을 먹었기 때문에 그의  뒤늦은 허풍은 아무런
효력을 얻지 못했다.
"방화촌 도적떼 우두머리가 아직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라고 하던데..."
"엥?"
세 사내는 다시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주위를 황급히 살피다, 서로  얼버무리듯
인사를 하고는 걸음마 나 살려라 하며 제각기 집으로 달려갔다.
방화촌 도적이라면 홍화 제일의 도적떼로, 주로 귀족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했
지만, 눈을 떠있을 때 코를 베어갈 정도의  실력을 자랑한다고 했다. 하물며 우
두머리라면 그들을 감쪽 같이 죽여버릴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들은 영문을 몰라하는 아내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방금  만났던 어린 녀석을
잊어버릴려 노력했다. 얼마나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면 감히 홍화의  천
자, 황제의 딸을 훔칠 생각까지 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난 사실에 부처
님의 자비에 대고 감사했다.
"싫어, 난 안가"
화화는 입술을 깨물며 휘문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13

점심나절까지만 해도 너무 행복했던 화화였다. 그를 생각하며 이제 제법 익숙해
진 요리와 바느질로 시간을 때우고, 그의 피리를 소중히 닦았었다. 그런데,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던 휘문이 심각한 얼굴로 들어서면서 보퉁이를 내던지자 마자
그녀에게 짐을 싸라고 한 것이다.
휘문이 마을에 내려가 들었던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음에도 화화는 고개를 흔들
었다. 자신을 환영해주고 두려워할 줄 몰랐던 마을 사람들이 그와  그녀 때문에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한 것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그들의 고통과 희생을 생각하
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17년을 살아오면서 이제야 겨우 잡은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휘문의 말대로 그녀가 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휘문은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화화는 그가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그가 죽는다고 해서 방화촌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번일은 화화를 걱정한 아비의  행동이라기 보다 감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자들에 대한 응징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때 황후가 살아있을땐 꽤 다정한 황제
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황제는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하는 여자
를 잃은 외로움으로 인해 고집스런 늙은이로 변해 있었다. 그는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그냥 놓아둘 자가 아니었다.
"난 여기에 있을거야. 그들은 우리가 가도 살아남을 수 없어. 휘문, 제발..."
한번만 눈 감으면 되었다. 이렇게 귀막고 눈막고 있으면 그들의 죽음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화화의 손을 그가 거칠게 떼어
냈다.
"난 간다. 그들은 내 형제요, 내 가족이야. 나의 행동 때문에 그들을 죽게 할 순
없어"
"그럼, 나도 같이 가. 나도  도우면 되잖아? 하지만, 내게  궁으로 돌아가라고만
하지 말아줘"
화화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안으로  뛰어들며 축축해진 볼을  그의 가슴에 대고
비볐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면 차라리 옆에
서 그와 함께 죽는 것이 더 나으리라. 그녀는 그들이 돌아가면 살아남을  수 없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가 황궁으로 돌아가야만 해"
"그는 널 살려두지 않을거야. 내가 궁으로 돌아가고  너가 스스로 잡혀들어가도
방화촌 사람들을 놓아주지 않을거야"
"나도 알아. 그래, 결국 개죽음을 당하겠지..."
휘문이 그녀를 그의 품에서 떼어내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내게 계획이 있어. 너도  잘 알지? 내가 싸움에  있어선 거의 천재라는 것을...
그들을 살려내고 나도 살수 있는 계획이 있어.  그러니까, 넌 궁에 가서 기다리
고만 있으면 되는거야"
"바보... 궁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 너는 궁에  들어올 수 없어. 내가 있는 월궁
근처에도 오지 못할거야"
그는 바보다. 그는 황제의 무서움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황제
가 살고 있는 궁의 웅장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7남 11녀의 자식을 둔
그가 자식들이 각각 살고 있는  궁을 제외하고도 몇 개의  작은 궁들을 가지고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황제의 전각에서 떨어져  있는 '월궁'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
"싫어. 차라리 너의 옆에 있을래. 난 궁에 돌아가지 않겠어"
어린아이같고 단순한 휘문은 화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그녀가
왠만큼 노려보면 그녀의 행동이  비록 자신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볼을 불룩하게 한채로 그녀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었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또 그를 위협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 만월... 보름달이 뜨는 날  널 훔치러 들어갈거야. 예전에도  널 훔쳤듯이
이번엔 그 대단하다는 하늘의 천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널 훔칠거야. 그리고 나
서는 방화촌 사람들을 안전한 곳에 정착시키고  우리는 다시 단둘이 되어 달아
나는 거야. 이번엔 정말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자. 하늘과 땅이 하나
인 곳, 저 신비한 가이아의 땅으로 달아나자"
휘문은 홍화의 바다 건너, 저 전설의 땅 가이아 이야기를 꿈을 꾸듯 몇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신비한 여신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 배고픔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땅...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이었다. 아무도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는 땅!
"싫어"
화화는 그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것에 동의한 것만으로도 자신은 최선
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궁에서 휘문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곳에 들어
가면 다시는 휘문을 만나지 못할것이 뻔했다. 혹여 휘문이 죽었다고  해도 소식
조차 알 수 없을만큼 궁은 넓고 깊었다.
"보름달 뜨는 날, 꼭 널 데리러  갈게... 나, 휘문이 언제 약속을  어긴 것 봤어?
휘문은 약속을 지킨다. 만월의 밤에 널 데리러 갈거야. 넌 내 각시니까"
가슴에 주먹을 두드리며 그는 자랑하듯 화화에게 예전의 말투를 꺼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도 어쩌면 마지막 이별이 될지 모른다는 슬픔과 두려움이 깔려있음
을 화화는 알았다.
"만월에... 가장 날이 밝은 그날 널 데리러 갈거야. 약속해"
화화는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의 가족
이자, 형제인 마을의 순박한 이들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녀가 그를 따라다니면 방해밖엔 되지 않을게 분명했다.
화화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음을 알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녀가 계
속 고집을 피 우면 어떻게  하나 하는 내심의 두려움을  안은채 긴장하고 있던
휘문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날 꼭 데리러 와야 해. 만월에... 나 기다릴테니까..."
"물론! 넌 휘문의 각시니까, 내가 꼭 데리러 간다"
이번엔 휘문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정면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
다. 화화는 믿었다. 그가 반드시 그녀를 데려오리라는 것을...
"나, 안아줘. 지금..."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 움막안은 희미한 그림자만 드리워졌을뿐 사랑을
나누기에는 밝았다. 그러나 화화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지금, 그의 품
에 안겨 자신이 살아있음 을, 그가 그녀 곁에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휘
문이 다가왔다. 절망과 희망의 갈림길 속에서 그들은 그 어느때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만월의 약속 (정연주) 8장-9장

"무슨 일이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휘문이 화화를 말에서  내려주고는 곧장 무리에게
다가갔다.

"황녀 때문이다. 내가 경고했지?  황녀를 돌려주지 않으면 이곳이  피로 물들게
될거라고..."

무햐가 나와 불길한 예언을 하듯 무겁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휘문은 무햐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화화도 재빨리  사람들의 화
난 시선을 피하기 위해 휘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악"

화화는 너무도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대여섯명
의 사람들이 땅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중 두세명은  이미 죽은 듯 보였다. 나머
지 신음을 흘리며 누워있는 사람들의 팔, 다리에선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내렸고,
'시무'로 보이는 사람이 그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휘문! 황녀를 돌려주어야 한다. 산 아래에 녹색의 물결로 가득찼다.  황군이 몰
려왔어"
"그게 말이 돼? 지금까지 우린 몇 번이나 황족들의 물건을 강탈했어. 그리고 그
들은 분개해서 군대를 보냈지. 하지만 우린 언제나 그들을 물리쳤다구"

마을의 장로중 한명인 햐료가 무햐와 함께 휘문에게 황녀를 돌려보내라고 말하
자, 휘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황녀탓에 이렇게 당한 것이  아니다. 그가 그들
과 함께 갔다면 이렇게 당하고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휘문은 자신이 있었다.
황녀는 절대 뺏기지 않을 것이다.
"바보같은 고집 피우지 말고 황녀를 돌려줘. 황녀도 돌아가고 싶을 거 아니냐?"
"말도 안되는 건 할멈이 더 해. 화화는 이제 돌아가길 원하지 않아, 그렇지?"
무햐를 노려본 후 휘문은 자신있게 화화에게 향했다. 이제 그의 여자가 된 화화
가 그의 곁을 떠나고 싶어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화화는 눈을 반짝이며 동의하기 원하는 휘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갈 수 없었다.
"화화? 왜 말을 안하지? 너와 난 가시버시를 맺었잖아? 넌 돌아갈 수 없어"
휘문은 놀란 듯 했지만, 그의 간절함이 깃든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화화는 대답
하지 않았다.

"가시버시라고?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그럼 혜류는 어떡하고?"

무리속에 끼어있던 혜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휘문의 곁으로 다가왔다.
"혜류가 휘문의 각시가 되어야해"
혜류는 화가 나 씩씩대며 휘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휘문의 시선은  고개를 숙
이고 있는 화화에게 멈춰있었다.
"설마, 황녀님을 강제로 욕보인건  아니겠지? 여자에게 그런 짓을  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던걸 잊은게냐?"
가만히 보고만 있던 무햐가 휘문의 곁으로  다가와 예의 지팡이를 휘두르려 하
자, 휘문이 재빨리 지팡이를 빼앗아버렸다. 그는 무척 화난 듯 했다.
"황녀는 휘문의 각시다. 그러니 아무도 빼앗지  못해. 황군들따위 이 휘문이 쫓
아버리겠다. 그들이 방화촌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겠다"
휘문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을에 울려퍼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휘문 말이 맞아. 우리가  황군따윌 언제 무서워했어? 무등산에선  우리가 왕이
다!!!"
"맞아, 휘문이 최고다!"
그러나 곧 잠시후 휘문 또래의 남녀가 휘문의 말을 그대로 따르며 소리를 지르
기 시작했다.
방화촌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황족의 무서움을 몰랐다.  그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마을의 장로들만이 안색이 흑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휘
문과 다른 사람들을 말릴 힘이 그들에겐 없었다.
"흥? 휘문의 각시가 되었단 말이지? 그래도 아이는 가지지 않았겠지?"
고작 열다섯된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지만, 화화가 얼굴을  붉히는 것
과는 대조적으로 혜류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망이 가득  담긴 시
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휘문의 아이는 내가 나을거야. 나도 이제 곧 여자가 된다고 했어. 그러면 휘문
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거야"
"너가 아무리 자라도 너한테 관심 가지지 않아. 내 여자는 화화뿐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불쑥 나타난 휘문이 혜류를 한손으로 들어올리더니 멀찍이 던
져버렸다. 다행히 혜류는 안전하게 착지한 다음,  혀를 내밀고는 사라져 버렸지
만, 화화는 어린아이같은 막무가내의 휘문이  자신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9

그에겐 혜류같은 여자가 더 어울렸다. 벌써 방화촌에서 2주나  지냈지만 화화는
아직도 '마르'에 익숙해질 수 없었고, 땅바닥에서 남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것도
불편했다.
처음으로 배고픔을 느껴보았던 화화는 그것이 병마나 악귀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르'를  먹이기 위해 휘문은  이틀동안 화화에게 그외의
음식을 주지 않았고, 화화는 결국 자존심을 눌렀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휘문은 점점 불어나는 마을 사람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경작하는 '
마르'의 양이 절대 부족하다고 말했다. 외부인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험한 산
지의 골짜기에는 곡식이 자랄 땅이 없었고, 그들은 2대에 걸쳐서 겨우  땅을 만
들었다고 했다.
화화는 생각보다 순박한 사람들이 그녀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취급해주는 것이 좋았다. 거칠기는 해도  휘문이 화화를 무척 아껴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틀동안 그녀가 자존심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을 때 휘문도 굶
었다는 것을 그가 비록 이야기하지 않았을지라도 화화는 눈치챌 수 있었다. 
"왜 아까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지? 설마, 아직도  여길 나가고 싶은거
야?"
휘문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화화는 어린아이같은 그가  화화의 대
답에 실망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황궁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1살 어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휘문보다 더 교활하고, 눈치가 빨랐
다. 그는 싸움을 잘  하고 지혜로울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이용하고 거짓말 할
줄을 몰랐다.
"난 강제로 여기에  끌려온거야. 돌아가고 싶어하는게  당연하잖아? 날 보내줘.
그럼 여기 사람도 더 이상 다치지 않을거야"
"넌 내 여자야. 내 각시라구"
휘문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새벽에 사랑을 나누었으면서도 그
에게서 떠나려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날 돌려보내줘"
주먹을 움켜쥐며 화화는 쏘아보는 그의 비아그라 눈빛을 참아내었다.  분노속에 스며있는
슬픔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려 하고 있었다. 사실은 자신이 정말로  돌아가길 원
하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황궁에서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 황녀만이 어쩌면 그녀를 그리고 있을 뿐이리라.
"안돼! 넌 내거다. 휘문의 여자야. 절대 돌려보내지 않아"
절규하듯 소리를 뱉어낸 휘문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화화를 거칠게 끌어안아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혹시나 그녀가 반항할까 두려워 근육을 잔뜩 움츠렸던
그는 화화가 부드럽게 안겨오자 긴장을 풀면서 그녀를 데리고 움막안으로 들어
갔다.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제 그에게도 가
족이 생겼다. 휘문은 새벽에 안겨오는  화화의 육체가 없이는 이제 잠을  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잠을 깬 화화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옆자리를 보고 그가 떠났음을 알았
다. 그는 황군을 물리치러 마을 청년을 이끌고 간 것이다.
부처님... 제발, 그를 살려주세요
화화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기원을 부르짖고 있었다.  황군의
무서움을 화화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휘문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난 무등산의 왕이야. 이곳엔 내가 모르는 것은 없다. 풀한포기의 위치조차도 난
다알아!
어린아이처럼 자랑하던 휘문을 떠올리며 화화는 벽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피
리를 품에 안았다.
언제였을까...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그의 성품 때문에 화화는 그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
리고 있었다. 처음 느낀  절망은 사라지고, 그를 달래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는 그녀를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후로, 그녀의
손을 잡거나 가끔 신기한 듯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는 해도 그이상의 심한 행동
은 하지 않았다.
마을 아이들을 훈련시킬때나 자기 또래의 다른  전사들과 훈련을 할 때의 호탕
한 웃음과 가끔씩 느껴지는 날카로움이 묘한  자극을 일으키며 화화는 몰래 그
의 모습을 훔쳐볼때도 있었다.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일까...
화화는 그의 행복에 찬 표정이 부러웠다. 그녀는 한번도 그처럼  그렇게 화끈하
게 웃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밤,  포근하고 안전한 느낌이 사라졌다.  은색달이
살짝 들어와 움막의 한쪽에 빛웅덩이를 만든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화화는
알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움막을 나섰다. 희미하게 어디선가 아주 구슬픈 피리 소
리가 들려왔다.
마을이 끝나는 위치의 넓은 '마르'의 물결위로 우뚝 솟은 회색빛 바위위에 그가
있었다.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 활짝  웃기만 하던 그가 은색의  달빛 아래 처음보는
서글픈 표정으로 피리를 부르고 있었다.
진한 외로움.
화화가 황궁에서 어쩌다 잠에 깨어나 적막한  고요가 감도는 황궁을 보며 느꼈
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그와  그녀는 동류다. 그에겐 가족이  없었고, 그녀에겐
그녀를 사랑해줄 사람이 없었다.
화화가 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피리에 심취한 채, 그는 자연과 동화되어 한폭
의 그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화화... 깼구나"
막 돌아가려고 뒤돌아서는데 밝은 휘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피리 소리가 끊기
고 그가 달려왔다. 낮에 보던 환한 모습. 은빛  달을 등지고 서 있는 그를 보고
그제서야 화화는 그가 자기에게 무얼 바라는지 알았다. 그는 가족을 원했다. 자
다 문득 세상에 혼자만 있다는 외로움을 그녀와 함께 떨쳐버리고 싶어했다.
조금씩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공동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는지  밖이 소란해
졌다. 그러나 화화는 점심도 굶은채, 계속 휘문의 움막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가 걱정되어 몸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진 움직일 힘이 없
었다.
"황녀님, 계시오?"
방화촌에서 마을 장로들만이 황녀에게 존칭을 썼다.
화화는 머리를 매만지면서 피리를 등뒤로 숨겼다.  잠시후, 휘장이 걷히면서 무
햐가 들어왔다.